형상의 침묵, 언어의 필연적 아이러니 - kim heejo

ARTIST’S NOTE | 5

형상의 침묵, 언어의 필연적 아이러니

2015-2025

: 감각의 세계를 가두고 다시 여는 문에 대하여


나는 종종 나의 작업 앞에서 낯선 괴리감을 마주한다. 캔버스 위에 구현된 블루(Blue), 옐로우(Yellow), 레드(Red)의 스키마들은 그 자체로 완전한 우주이며, 어떠한 설명도 필요 없는 직관의 영역에 존재한다. 그러나 전시장에 서는 순간, 혹은 작가 노트를 적어 내려가는 순간, 나는 필연적으로 '언어'라는 옷을 꺼내 입어야 한다. 나는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이미지를 만들었으나, 그 이미지를 타인에게 전달하기 위해 다시 언어의 속박 안으로 걸어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술가에게 주어진 꽤나 지독하고도 기묘한 아이러니이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은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라고 했다. 하지만 예술가인 나에게 이 명제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나의 세계는 언어보다 훨씬 광대하지만, 그것이 타인의 인식 속에서 '유효한 의미'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언어라는 좁은 문을 통과해야만 한다. 여기서 예술의 흥미로운 순환이 발생한다. 예술은 가장 먼저 날것의 감성으로 관람자의 시각을 타격한다. 그러나 그 감각이 휘발되지 않고 하나의 '사유'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이성적 판단과 학습, 즉 언어의 개입이 필수적이다. 언어를 거친 감각은 비로소 더 깊고 단단한 층위의 감성으로 진화한다. 이성(Logos)이 감성(Pathos)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감성을 '업그레이드' 시키는 것이다.
 
나의 작업 <BYR Organic Schemata> 역시 이 순환 구조 위에 놓여 있다. 나는 정사각형(Blue), 정삼각형(Yellow), 원(Red)이라는 가장 기초적인 기호들을 통해 인간, 자연, 우주의 본질을 이야기한다. 이들은 언어 이전의 언어이자, 만국 공통의 시각적 원형이다. 내가 '존재론적 불완전성'이나 '인과율의 재구성'을 논할 때, 사실 나는 그 형이상학적 개념들이 텍스트로 정의되기보다 오직 색과 형, 그리고 공간 속의 공명으로만 전달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보는 자(Viewer)와 보여주는 자(Artist) 모두 언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언어는 불완전한 세계를 견디게 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의 작업을 설명하려 드는 순간, 견고했던 'Blue'는 '인간'이라는 단어 속에 갇히고, 역동적인 'Yellow'의 생명력은 '자연'이라는 명사 아래 정지하며, 무한했던 'Red'는 '우주'라는 텍스트로 환원된다. 이것은 명백한 축소이자 왜곡이다. 그러나 나는 이 불편한 과정을 기꺼이 수행한다. 왜냐하면 그 불완전한 언어야말로 나와 타인, 그리고 세계를 연결하는 유일한 가교이기 때문이다.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시선처럼, 우리의 지각은 세계와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언어는 그 얽힘을 가시화하는 도구다. 나의 '언어'는 작품을 규정짓는 틀이 아니라, 관람자가 나의 스키마 속으로 걸어 들어올 수 있도록 돕는 '초대장'이어야 한다. 시각적 충격으로 먼저 다가가고, 언어적 사유로 그 충격을 붙잡아 두며, 마침내 다시 언어를 잊게 만드는 침묵의 공명으로 이끄는 것. 이것이 바로 나의 <Schematic Medium>이 지향하는 바다. 
 
결국 예술이 아무리 '보는 것'이라 해도, 우리는 '읽는 행위'를 통해 다시금 제대로 '보게' 된다. 나는 이 아이러니한 순환을 더 이상 모순으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직관과 지혜가 서로를 지탱하며 완전한 균형을 이루는 상태이다. 언어의 속박을 경계하면서도 기꺼이 그 속박을 디딤돌 삼아 감각을 확장시키는 것. 그것이 내가 형상을 구축하고, 동시에 언어를 재구성하는 이유이다. 이미지의 직관과 언어의 사유가 온전히 하나 될 때, 비로소 예술이라는 완전한 세계가 열리기 때문이다.